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순천 10.19 사건 (문단 편집) ==== 김지회 배후설(소수설) ==== 소수설에 따르면 반란 직전 몇가지 사건이 동시에 돌아가는데, 첫째로 48년 10월 12~3일경, 김지회 중위와 최일주 일병은 남로당 수장인 [[박헌영]]의 오른팔이자 ‘지리산 유격전구’ 사령관인 [[이현상]]에게서 [[제주 4.3 사건]]에 파견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현상은 남로당원이기 때문에 김지회의 상급선이 아니지만 소련군정과 북로당 대표라는 신분을 겸하고 있어 김지회에게 명령을 내릴 자격은 있었다. 다만 이현상이 직접 김지회에게 지시했는지, 북로당, 즉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 것인지가 불분명해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둘째로 [[전라도]] 내의 4연대와 14연대를 관할하는 광주 제5여단 정보참모 김창선 소령은 군내 좌파 계보를 파악하여 우선 4연대 50여명을 구속하고 이어 48년 10월 16일 14연대 사병 40여명을 연대 내 영창에 색출하고[* 당시는 철모, 작업모가 전부 부족하여 정모를 많이 착용했는데 좌파계열 장병들을 이 정모의 턱걸이 끈을 의도적으로 T자형으로 묶어서 상호간 성분식별의 암호 표지로 이용하고 있었다. 김창선 소령은 이 사실을 알고 턱걸이 끈을 T자로 묶은 병사들을 색출하였다.] 주모자급 3명은 광주의 여단 본부로 압송하였다. 이어 좌파성향 때문에 연대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된 김지회 중위와 9중대장 홍순석 중위도 즉각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막 부임한 박승훈[* [[일본군]] 출신. 50세 후반의 중령] 신임 연대장이 반대하자, 김창선 소령은 일단 여단으로 복귀 후 다음날인 17일 김지회와 홍순석에게 광주 여단 본부로 출장 명령을 내렸다. 광주에 도착하면 구금할 목적이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에게는 똥줄 타는 상황이었다. 셋째로 우연히도 같은 날인 17일 고향에 휴가 갔던 병사들이 구례경찰서 형사들과 충돌했는데 빨갱이 혐의를 받고 경찰서에 끌려가 뭇매를 맞고 풀려나 귀대하였다. 그러자 연대에서 구례경찰서를 습격하자며 아우성이 일어났다. 연대장 박승훈은 여단본부로 부임인사를 하러 가서 공석이였고 부연대장 이희권 소령이 대신 여단으로 보고하면서, 장병들을 진정시키고 사기앙양을 위해 일부 병력을 구례에 보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하는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김지회와 홍순석의 여단본부 출장 명령은 흐지부지되었다. 넷째로 18일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주도 출동명령을 받은 대대는 제1대대였고, 김지회의 연대대전차포 중대도 제1대대로 배속되었다. 출동 날짜는 19일이었다. 즉, 군내 좌파세력에게는 상급선에서는 무장봉기를 일으키라고 하고, 군내 상부기관에서는 그들의 혐의를 파악하여 체포 직전까지 이르렀고, 부하들은 경찰들과 충돌했지, 그와중에 제주도로 출동 명령이 떨어진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 연대에 대형 [[트럭]]이 4대 밖에 없어, 이것으로 1개 대대의 장비를 여수항까지 운반하려면 한세월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밤이 되도록 병력 이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밤 10시경 1대대는 완전 무장한 채 [[내무반]]에서 대기중이었고 2·3대대는 취침 중이었다.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장비 선적을 위해 여수항으로 나가 있었다. 이때 연대 본부 옆에 위치한 연대 근무중대에서 갑자기 총성 1발이 울리고, 거의 동시에 연대 정문의 위병소에서 비상나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비상소집으로 인지한 각 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 본부 앞으로 일반 집합한 이후 연대 종합연병장으로 집결하였다. 1대대 부관 김정덕 소위가 연대 근무중대 앞을 지나는데 사병들이 그를 무조건 구타하였다.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조병모 소위가 “왜 장교를 구타하느냐?”라고 꾸짖자 구타하던 사병들은 [[총검]]으로 조 소위를 찔러 쓰러뜨렸다.(첫번째 희생자) 조병모 소위는 반란 사병의 총에 팔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도망가 대대본부 앞에 있던 전용인 소위에게 까지 가서 쓰러졌다. 조병모 소위를 쫒아오던 4~5명의 반란 사병은 조병모 소위를 그냥 지나쳐서 무기고와 탄약고를 지키던 보초를 쏴 죽이고 문에 잠겨있는 열쇠를 총으로 부수어 연 뒤 점거하였다. 제5중대 주번사관인 박윤민 소위는 주번사령에게 비상문의를 하러 가다가 탄약고쪽에서 쏘는 반란병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한편 규정대로 연대 전 장병들이 연대연병장에 집결했는데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뒷산에서 신호탄이 날았다. 또한 사복 차림의 민간인들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남로당 여수군당 위원장 이용기가 이끄는 여수지역 좌파청년] 이 와중에 지창수가 사복차림의 민간인들과 함께 연병장 사열대로 뛰어올라가 "경찰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온다."라고 선동하면서 진압파병 거부, 제주 [[빨치산]]에 호응하여 본토에 제2전선을 구축, 남북통일을 위한 [[조선인민군]]으로 행동할 것을 선동하였다. 지창수의 ‘병사 소비에트’ 소속 병사들이 연대 장병 곳곳에서 “옳소! 옳소!”하면서 동조하였다. 그때 3명의 하사관이 앞으로 나서며 “지창수, 너 어쩌자고 이러는 거냐!”, “여러분! 우리는 엄연한 국군입니다. 불순분자들의 선전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라며 군인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러자 반란병들이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어 ‘병사 소비에트’의 특수공작책 심재호 상사의 지휘로 반란병들은 전 부대를 뒤지며 모든 장교를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발견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날 사살된 장교들은 1대대장 김일영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등 대대장 전원과 연대 작전주임 장교 강성윤, 정보주임 장교 김래수 중위, 진도연, 김녹영, 맹택호, 박경술, 민병여, 김진역, 이상술, 장세종, 이병순, 노영우, 이상기 소위등 20여명에 달했다. 동년 5월에야 창설된 14연대는 장교 충원율이 낮아 경비사관학교 5기생인 10여명의 소위들이 모두 중대장을 맡고 있었고, 각 소대장직은 고참 하사관들이 맡고 있었다.[* 당시 대대장과 연대 작전주임까지는 경비사관 2기였고, 가장 막내는 6기였다.] 14연대 내 장교들이 대부분 살해되었을 때에야 여수항으로 수송장교 윤중위를 통해 반란 소식이 알려졌고, 이에 상황을 살피러 부연대장이 정보주임 김제주 중위를 대동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김제주 중위는 연대 탄약고에서 수화하다가 사살되었고, 부연대장은 연대본부까지 포복으로 기어가 확성기 마이크를 잡고 "불순분자들의 명령에 넘어가지 말고 [[대한민국]]에 충성할 군인들은 연대본부 앞으로 집결하라."라고 절규하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총알 세례뿐이었다. 결국 부연대장은 차를 타고 빠져나와 여수읍 헌병 파견대로 향해 그곳에서 순천에 파견된 14연대 2개 중대를 이끄는 홍순석 중위에게 전화하여 반란 진압 출동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순석은 상술했다시피 ‘콤 서클’의 핵심 멤버로 연대내 반란이 성공했다는 것을 알려준 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김지회 중위는 연락병 겸 북측 감시원인 최일주 일병을 대동하고 연대 대전차포 중대장실에서 나와 반란군을 직접 지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지나가던 유창남 상사가 김지회에게 왜 봉기에 가담하지 않냐고 힐난했는데 이후 반란군의 포로가 된 미군 고문관 모어 중위, 그린바움 중위를 구출하고 탈출하여 여순반란 사건의 내막에 대해 가장 충실하게 증언한다.] 이후 김지회는 아직은 자신이 노출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최일주 일병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반란군을 지휘한다. 이상이 김지회가 주도했다는 배후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